'해외입양, 공허한 비판과 환상'

한국은 '고아수출국'이라는 오명을 갖고 있다. 수많은 버려진 아이들의 국내 입양은 거의 없다시피 하니 해외 입양이 많은 수를 차지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 가족', '우리 민족' 등 우리를 강조하고 피의 순수성을 은근히 강요하는 문화가 만들어낸 현상일 것이다. 더불어 '부모없이 자란' 고아에 대한 사회적 편견 또한 한몫을 했다.

자칭 진보적이며 합리적이라는 나도 그에 대한 편견과 거부감을 부끄럽게도 가지고 있었다. 여러가지 합리화의 탈을 쓰고...

그러던 와중에 월간 말지에 실린 기사 '해외입양, 공허한 비판과 환상'이란 기사를 읽고는 고아와 입양을 둘러싼 우리사회의 구조적 문제는 도외시한 채 현상만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른 채 했을 지도 모르지만...

문제의 해결은 고아나 미혼모에 대한 편견을 깨는 것이고 미혼모를 양산하는 가부장제도와 보수성을 깨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개개인의 양심과 사고의 전환이라는 무책임한 해결책이 아니라 고아에 대한 국가의 정책적 지원과 시스템 개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한국의 정부는 너무나도 할 일이 많은데 너무나도 구태의연하고 뻔뻔스럽게도 국민의 위에 군림하고 있어 안타깝다.

해외입양, 공허한 비판과 환상



SBS <일요일이 좋다>의 ‘사랑의 위탁모’에서는 입양을 앞둔 어린 아이를 유명 여성 연예인들이 돌본다. 당연히 결말은 비극적 감동을 자아낸다. 위탁모는 정든 아이와 이별을 해야 하며 시청자는 여성 연예인의 비통한 표정을 지켜봐야 한다. 황당하거나 불편한 점이 없지 않지만 제작진은 상업적이면서도 상당히 안전한 아이템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것 같다. 프로그램의 계산속이 보이지만 대놓고 비판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작고 가엾은 아이와 그에게 헌신하는 여성에 대해 험담하는 건 금기를 위반하는 모험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의 위탁모’가 제시하는 대의도 회의의 대상으로 삼기 어렵다. 해외입양을 줄이고 국내 입양을 늘리자는 것이 ‘사랑의 위탁모’가 내세우는 구호이다. 오랫동안 ‘고아 수출 1위 국갗라는 사실을 불명예로 여겨왔던 우리들로서는 그 구호에 토를 달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런데 토를 달거나 반박할 수는 없지만 ‘해외 입양을 줄이자’는 캠페인이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국내 입양보다 국외 입양이 왜 더 해롭고 부도덕한 것인지 ‘사랑의 위탁모’는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대전제로 삼고 있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TV는 오히려 해외 입양에 대한 환상을 키워왔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흔한 ‘가족 상봉 프로그램’을 보면 해외 입양이 오히려 하층 가족에게 기적이나 축복처럼 묘사된다. 즉 유럽과 미국 등 세계의 중심으로 입양된 아이들이 번듯하게 성장한 후 한국에서 여전히 가난하게 살고 있는 생모를 만나는 모습들을 우리 사회의 TV는 거듭 방송해 왔다. TV 등 미디어는 해외 입양을 반대하면서도 동시에 해외 입양에 대한 환상을 일으키는 자기 모순에 시달려 왔던 것이 사실인 것 같다.

해외 입양보다 국내 입양이 낫다?

지난 5월 8일과 9일에 방송된 좧MBC 스페셜 - 어머니 나 여기 있어요좩는 입장이 대단히 선명했다. 제작진은 해외 입양의 비극성에 관한 구체적인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미국과 유럽을 직접 다녀왔다. 프로그램에는 행복한 입양아에 대한 스케치도 포함되어 있었다. 심각한 언청이 장애를 타고난 남자아이는 양부모가 막대한 수술비를 부담하고 보살핀 덕에 피아노 연주를 즐기고 동료들과 잘 어울리는 고등학생으로 자랄 수 있었다고 했다. 청각 장애가 있는 한 여성은 일반인들과 대학교를 다니며 성공을 꿈꾸고 있다. 하지만 좧MBC 스페셜좩의 방점은 그들의 고통과 소외감과 실패담과 원망 등에 두어져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북유럽의 남자들로부터 아시아 창녀로 취급받았다는 한 여성의 술회가 있었다. 양부모의 이혼으로 가족이 해체된 사례도 소개되었다. 또 유럽 어느 국가에 입양된 한 남성은 왜소한 체격과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따돌림받았고 현재는 실업 연금에 의지해 홀로 살고 있었다. 스웨덴에서 미혼모로 살아가며 한국을 원망했던 수잔 브링크는 15년 전 방송사의 주선으로 친모를 만났지만 지금은 수년 째 연락을 끊고 살아간다고 했다.

한국의 친지들이 그녀를 이용하려 했던 것이 갈등의 원인이었다고 한다. 한 정신과 의사의 진단이 입양아 출신자들의 정신적 고통을 요약한다. 근원에 대한 기억이 없는 입양아들은 평생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진술들은 적잖게 놀라운 것이었다. 막연히 평화롭고 정의로우며 합리적일 것이라고 생각한 복지국가들이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사실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아울러 해외 입양의 그늘을 집중적으로 다룬 프로그램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가 특별해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필자로서는 의문이 깨끗이 해소된 것은 아니다. 버림받은 아이들에게는 해외 입양보다 국내 입양이 월등히 유리한 것일까? 지난 한 해 동안 해외로 입양된 3천8백여 명의 아이들보다는 1천7백여 명의 국내 입양아들이 행운을 잡은 것일까? 민족주의적 의분이 강한 사람은 당연히 그렇다고 즉답할 것이다. 하지만 좀더 합리적인 태도로 해외 입양을 반대하기 위해서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즉 우리 사회가 개인에게 안전하고 많은 기회를 열어준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산층들은 이른바 선진국으로의 이민과 원정 출산을 꿈꾸지만 실은 우리 사회의 차별 구조와 부조리가 그래도 견딜 만하다고 단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미혼모에 대한 편견을 버려!

해외 입양과 국내 입양을 양팔 저울에 올려놓고 따지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 답이 잘 나오지 않는다. 대신 조금만 더 급진적인 태도를 취하면 문제는 더 간단해진다. 입양보다는 친부모의 직접 양육이 훨씬 낫다는 데에는 대부분이 동의할 것 같다. 친부모가 아이를 직접 기를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주면 비극은 줄어든다. 지난해 버려진 1만2백22명의 아이들 중 절반 정도는 미혼모가 낳은 아이들이다. 미혼모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양육의 호조건을 만들어주면 입양을 둘러싼 우리 민족의 자격지심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입양 문제를 다루는 TV 프로그램들의 차세대 과제는 분명해진다. 애 낳은 처녀를 도덕적 파탄자로 보는 세상의 편견을 씻어낼 오락 프로그램을 시작하면 된다. 애 딸린 미혼모와 멀쩡한 총각의 사랑을 아름답게 치장하고 부각시켜도 효과가 높을 것이다. 또 국내 입양 가족에 대한 지원만큼이나 미혼모에 대한 국가의 전폭적 지원이 더 시급하다는 아젠다를 만들어내면 된다. 보수적인 우리 사회 미디어로서는 실행하기 어려운 필자의 공상일 뿐일까?

어쨌거나 해외 입양은 안 된다고 설득하는 요즘 TV 프로그램들의 어정쩡한 절충주의는 회의의 대상 되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