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은 곧잘 다른 감정과 논리 뒤에서 숨는 경향이 있다
두려움이란 감정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솔직한 감정 표현이 부정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두려움이란 감정은 기쁘다든지 슬프다든지 등 다른 감정과 달리 쉽사리 표현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두렵다는 것은 '겁쟁이' '비겁' '열등' '위축' 등 부정적인 단어들과 바로 연결되어 자존감에 심각한 생채기를 내기 때문에 많은 경우 인정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우리는 본능적인 자기방어 기제 그리고 후천적 학습을 통해 반복적으로 감정 숨김을 훈련하게 된다. 어린 시절 떠올려보면 '용기는 긍정-두려움은 부정'이라는 전형적 관점을 부모가 가르치면서 아이는 자연스럽게 부정적 감정을 부정하거나 숨기게 된다. 특히 한국같이 예의범절과 유교적 태도를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내 마음 나도 몰라"
그런 세월을 지나다보면 우리는 스스로 '솔직한' 감정이 뭔지 조차 알아차릴 수는 지경까지 이를 수 있다. 겹겹이 감추다 보면 실제 감정과 표현되는 감정(행동)은 완전히 달라지고 본인도 잘 모르게 되는 것이다.
원천은 '두려움'이지만 스스로 느끼는 감정과 타인에 표현하는 감정이 혼재되어 내 마음 나도 모르는 상황을 만나게 된다. 나도 날 모르는 상황에서 타인과의 소통은 가능할까. 하지만 살다보면 그런 일이 흔하디 흔하지 아니한가.
예를 들어보자. 자식의 공부에 열심인 부모를 보자. 자식이 공부를 못하고 아이는 의지도 없어 보이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타일러도 보고 좋은 학원도 소개해보고 아이가 원하는 물건 등을 사주기도 하며 참아보지만 결국 부모가 느끼는 감정은 '분노'이다. 분노의 대상은 무책임해보이는 배우자일 수도, 자랑질만 하는 이웃집일 수도 있고 죄없는 회사 동료일 수도 있지만 결국 대상은 자식이다. 내맘대로 되지 않는 자식 말이다.
부모가 느끼는 감정은 '분노'지만 아이에게 표현하는 감정은 '사랑'이다.
"내가 널 사랑하니까 이러는 거야" "부모니까 이러지 남이면 관심도 없어" 등 이야기하며 자식을 혼내는 경우가 많다. 성역인 부모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분노'이다.
'분노'의 소스는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남녀간의 사랑도 있는 그대로에서 시작하고 아이 또한 태어난 그대로, 뭔가 하지 않아도 존재 그 자체로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자식을 혼내는 마음 그대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이가 공부하지 않는 것에 대해 느끼는 부모의 원천 감정은 바로 '두려움'이다. 치열할 경쟁사회에서 도태될까 하는 두려움, 현재 가진 조그만 부와 명예를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자식으로 인해 남들에게 비교당할까 하는 두려움 등 '두려움' 말이다. 두려움은 어릴 적부터 학습되어온 것이기도, 온갖 풍파를 겪은 한국역사의 흔적이 남겨준 무의식의 산물이기도, 또 인생을 살며 직간접적으로 느낀 후천적인 경험에 기인한 것이기도 한 감정이다.
실제 감정을 모른다는 것,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 자식과 소통이 가능할까. 아니 아이 자신은 스스로에게 솔직할 수 있을까.
"안다면 기존과 다를 수 있다"
다른 감정과 논리 뒤에 숨어있는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면 스스로에게 또 다른 이를 기존과 다르게 만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두려움을 정면으로 직시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라고 묻는 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나의 행동과 감정의 원천이 두려움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즉 '겸손해진다면' 스스로를 인정/위로할 수 있고 타인 또한 있는 그대로 인정/위로할 수 있게 된다.
알아차리는 방법은 '관찰'이다.
한발자국 떨어져, 잠시만 반호흡 늦춰 스스로 관찰한다면 알 수 있다. 나도 몰랐던 내 마음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