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진정으로 공감하기

니힐이 2013. 4. 14. 03:15

며칠 전 어느 까페에서 있었던 일이다.

누구를 기다리면서 건물로비에 앉아있는데 초등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와 조부모로 보이는 어르신 두 분도 누구를 기다리는지 내 근처에 앉는다.

아이가 조잘거리자 할머니가 말씀하신다.

할머니 “조금만 빨리, 또박또박 이야기해보자. 할.아.버.지”

아이는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려 애쓴다.

아이 “하…ㄹ..아아아…버…지”

그제서야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있던 난 고개를 들어 여자아이를 유심히 본다. 아주 약간은 고정되지 않은 시선, 굼뜬 행동이 지체장애아로 보인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수준인 듯하다.

그사이 할머니는 다시 아이에게 물어한다.

할머니 “000아 먹고 싶은 거 없어? 말 좀 해보자.”

아이 “아….이….스…끄..리..ㅁ”

할머니 “정확히, 빨리 이야기해보자”

아이 “머고 시퍼, 아이…스…끄림”

할머니 “잘했다. 앞으로는 조금씩만 빨리 해보도록 노력해보자”

할머니 목소리는 약간은 애타는 듯 했다.

이후로도 비슷한 상황은 반복되었다.

아마 그 여자아이는 할머니 손녀이리라. 지체아인 손녀에 대한 할머니의 복잡다단한 마음이 온전히 느껴진다. 아마 이런 것이 ‘공감한다’는 의미이리라.

아마 손녀를 소위 ‘정상아’처럼 만들고 싶은 조급함과 본인생각처럼 따라오지 못하는 손녀에 대한 안타까움, 하지만 맘대로 표현할 수 없어 인내하는 모습, 그리고 간혹 괜시리 주위를 둘러보며 아이를 보호하는 복잡한 심경까지…그리고 아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이는 앞으로 커가면서 사회로부터 상처로부터 자유로는 사람으로 커갈 수 있을까. 그것도 우리네 같이 ‘다름을 틀림으로 아는’ 사회에서 말이다.

공감한다는 건 상황 자체를 온전히 그대로 받아들이고 복잡함은 복잡함 그대로, 단순하게 쉽게 평가하지도 않고 통합적으로 보는 것이다.

진정으로 공감하지 않은 채 뭔가를 인식한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빠른 판단력과 뛰어난 실천력을 장려하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공감’능력을 퇴화시키는 것 같다.